ҽ

“교만은 형제애 감수성을 해치는 악덕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3월 6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악덕과 미덕에 관한 교리 교육을 이어가며 ‘교만’을 설명했다.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사순시기를 보내며 “하느님과 같아지겠다는 어리석음이 자리잡고 있는” 악덕인 교만과 맞서 싸우라고 권고했다. 교황은 교만을 치유할 수 있는 진정한 치료제가 겸손이라고 강조했다.

교리 교육: 악덕과 미덕 10. 교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악덕과 미덕에 관한 교리 교육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교만’(superbia)에 대해 살펴보면서 악덕에 관한 교리 교육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은 교만을 “과도한 자기 영광”이라는 의미의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사실 교만은 자기 높임, 자만, 허영을 말합니다. 교만은 예수님께서 악은 항상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해 언급하신 일련의 악덕에도 등장합니다(마르 7,22 참조).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실제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남보다 더 대단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하며, 항상 자신의 공적을 인정받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며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설명으로 미루어 볼 때 교만이라는 악덕은 지난주에 살펴본 악덕인 자만(허영)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만이 인간 자아의 질병이긴 하지만, 교만이 일으킬 수 있는 파괴력에 비하면 자만은 아직 유아기에 해당하는 질병입니다. 고대 수도승들은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분석하면서 악이 진행되는 특별한 순서를 인식했습니다. 식탐과 같은 가장 저속한 죄에서 시작하여 가장 사악한 괴물과 같은 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죠. ‘모든 악덕 중에서 교만은 모든 악덕의 여왕입니다.’ 단테 알리기에리가 자신의 저서 『신곡』 연옥편에서 교만을 연옥의 첫 번째 둘레에 배치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악덕에 빠지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 악덕을 고치려면 다른 어떤 전투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전투에 나서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실로 이 악덕에는 본질적인 죄, 이를테면 하느님과 같아지겠다는 어리석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우리 선조들의 죄는 모든 면에서 교만의 죄입니다. 유혹자는 그들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될 것”(창세 3,5 참조)이라고 말합니다. 영성 작가들은 교만이 일상생활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교만이 어떻게 인간관계를 망치는지, 교만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야 할 형제애라는 감수성을 어떻게 해치는지 강조하는 데 특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한 사람이 교만의 악덕에 굴복했을 때 드러나는 증상은 여러 가지입니다. 교만은 분명히 육체적 측면을 지닌 악덕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거만하고, 목에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굽힐 줄 모르는 굳은 목, 곧 “뻣뻣한 목”을 가지고 있죠. 그런 사람은 타인을 쉽사리, 경멸적인 태도로 판단합니다. 자신이 보기에 결정적으로 무능하고 능력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돌이킬 수 없는 판단을 내립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도덕적 교훈은 거의 주지 않으셨지만 그 가운데 하나에 대해서는 단호하셨던 것을 잊곤 합니다. 바로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남을 판단(심판)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약간의 건설적인 비판이나 무해한 의견을 제시했을 때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위엄에 해를 가한 것처럼 과도한 방식으로 반응하고, 분노하고, 큰 소리를 지르고, 울분에 가득 차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모습을 보게 되면 여러분은 교만한 사람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교만에 병든 사람과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와 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로잡아 주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과는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언젠가 그가 쌓아 올린 건물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속담에 “교만은 말을 타고 떠났다가 걸어서 돌아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들을 많이 상대하셨으며, 심지어 이 악덕을 잘 숨긴 사람들에게서 교만을 폭로하시기도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모든 시험 앞에서 자신의 충실함을 과시합니다. “모두 스승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 참조) 그러나 그도 곧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토록 가까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스승님의 죽음 앞에서 두려워했습니다. 얼굴을 들지 못한 채 통회의 눈물을 흘리던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고 마침내 교회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과시하지 않는 것이 나을 뻔한 자만을 드러냈지만, 이젠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에 나오는 주인이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맡길 수 있는”(루카 12,44 참조) 충실한 종과 같은 제자가 되었습니다. 

구원은 온갖 교만한 행위에 대한 참된 치료제인 겸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모의 노래’(Magnificat, 마니피캇)를 통해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다”고 노래합니다. 교만한 자들이 바라는 대로 하느님의 것을 훔치는 것은 헛됩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야고보 사도는 교만으로 인한 내적 갈등으로 상처 입은 공동체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야고 4,6).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번 사순시기 동안 우리의 교만과 싸워 이기도록 합시다. 

번역 김호열 신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

06 3월 2024, 21:52

일반알현 최신기사

모두 읽기 >